1
오 신이시여..
인간이 외쳤다.
저에게 구원을 주십시오.
신 앞에 무릎을 꿇은 인간.
신은 두 발로 꿋꿋이 선채로 뒤에서부터 비치는 눈부신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두 눈은 다소 차가웠지만 입가에는 따스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인간이 말했다.
저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저에게 그것을 주실 수 있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발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신은 침묵했다.
인간은 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마음 한켠에 아려왔다.
인간은 이를 악물었다.
왜.. 왜 저에게는 당신의 구원이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요..
왜인지라도 말해주시겠습니까.
신은 여전히 침묵했다.
한 마디라도 해주십시오..
침묵.
인간은 갑자기 번개같이 일어나서는 신의 뺨다구를 냅다 갈겼다.
하지만 신은 아무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표정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인간의 주먹만 아플 뿐.
신은 그저 눈부신 광채를 흩뿌리며 선채로 인간을 차디찬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인간은 다시금 전력을 다해 연신 주먹을 신에게 날렸다.
쿵
신이 쓰러졌다.
둔탁한 소리로.
하지만 그 눈부신 광채와 차디찬 눈빛은 변하지 않고 인간을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신은 변하지 않았다.
2
아빠! 저 사람은 왜 산타 할아버지랑 싸우는거예요?
크리스마스 이브. 하늘은 어두컴컴하고 거리는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흥겨운 캐럴로 즐거운 분위기다.
응.. 저분은 술에 취하셔서 그렇단다.
한 남자가 술에 취한채로 크리스마스를 맞아 가게 앞에 놓인 산타 동상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고 있다.
산타 동상은 동상을 비추고 있는 주변의 노란 조명으로 환하다.
남자는 처음에는 동상 앞에 무릎을 꿇고 혼자 뭐라고 중얼대더니, 다음에는 뺨을 치고 이젠 주먹으로 때린다.
동상이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지자 이젠 발길질을 해대기까지..
가게 점원이 나와서 황급히 말리지만, 취한 사람의 힘을 쉬이 감당해낼 수 없다.
이제 동상은 남자의 눈 묻은 신발에 채여 무척 더러워졌다.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술을 마셔도 곱게 마실 것이지 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차며 갈길을 가는 노인들도 있고 잠자코 지켜보는 부모와 키득키득 웃는 아이들, 좋은 구경거리 났다 하면서 멈춰서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연인들도 있다.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3
동상은 남자의 계속되는 발길질로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남자를 말리던 점원은 울상이 되었다.
사장이 아마 급여에서 깔 것이다.
그런데 술에 취한 남자는 동상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하자, 술이 깬 모양이다.
에이.. 신이 아니라 동상이었네. 퉷.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침을 뱄고는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사라지고 서서히 금이 가던 동상이 완전히 두 조각으로 갈라져 바닥에 나뒹구는 순간, 그 안에 있던 황금빛 지폐 수천장이 하늘을 펄럭이며 겨울의 찬공기를 가르고 날기 시작한 게 아닌가!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잡으려고 난리다.
더 많이 잡기 위해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서로 치고 넘어뜨리고 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내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나타난다.
뒤따르는 다른 경찰들도 함께 모여 사람들을 저지한다.
더이상 사람들이 서로 다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많던 돈은 이미 어딘가로 다 사라졌다.
마지막 한 장은 맨 뒤 대열에 있었던 경찰관 한 명이 호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봤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다친 이들이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래도 그들은 행복해 보인다.
저마다 양손에, 각 패당 주머니에 한 뭉치씩 챙겼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동상 주위로 몰리면서 동상은 사람들의 발길질에 완전히 짓이겨져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소란이 잠잠해지고 모든 지폐가 다 사라진 후로도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지며 혹시 어딘가 남은 지폐가 없나 보는 것이다.
주머니가 두둑한 몇몇도 여전히 그곳에 머문다.
4
이야.. 이게 얼마야! 웬 횡재냐!!
그러게요.
아빠! 나도 몇 개 잡았어요..
나도요!
잘했다! 잘했다! 아빠한테 주면 아빠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부모와 아이. 가족이 차에 모였다.
때아닌 용돈으로 싱글벙글하다.
애들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에도 몇 개가 들려 있다.
어…?! 이게 뭐야!
돈을 세보려고 자동차의 불을 켠 아버지가 놀란다.
심하게 다쳐서 병실에 누워 있는 할머니와 손주.
할머니.. 어디가서 이렇게 다치셨어요.
우리 손주 용돈 가져왔지이이..
…응?!
꿈에 가득 찬 커플.
흐하하.. 이걸로 우리 뭐하면 좋을까?
일단 고급 레스토랑부터 어때? 그 다음엔 백화점 가서 원하는 거 다 고르자!
좋아!
스테이크, 파스타, 샐러드, 그리고 고급 와인까지.
여기 계산이요!
네 손님. 359200원입니다.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지폐를 내민다.
5
점원은 남자가 내민 지폐를 유심히 보다가 한 마디 꺼낸다.
손님.. 죄송하지만 이건.. 지폐 모양 메모장인데요.
네?! 그럴리가요.
자, 다시한번 제대로 보세요.
점원은 데스크에 가지고 있던 손전등으로 지폐를 비춰줬다.
거기에믄 조그마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돈보다 귀중한 마음. 사소한 기록으로부터..’
그럼 이건?! 이것도?!
전부 다 지폐 모양의 메모장이다.
하지만 질감도 감촉도 이렇게 진짜 같을 수가 있다니..
그만큼의 돈이 없었던 남자는 주저 앉았다.
fin.
이상과 현실의 간극
술에 취한 사람의 이상에서는 동상이 신으로 보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그저 산타 동상에 불과했고, 술에 취한 사람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이 명백한 사실을 새로운 장면으로 비튼다.
산타 동상이 깨지면서 거기에서 모두가 볼 수 있는 황금빛 용이 하늘로 승천하고, 쪼개진 산타 동상에서는 돈이 훝날리는 것을 보면서, 현실의 사람들은 내년에는 운이 좋으려나 보다. 용을 봤으니 대통할 팔자로구나 하면서 이상에 젖어든다.
저자는 생각보다 술취한 사람의 이상과 현실에 있는 사람들의 이상이 별로 다르지 않음을 이 장면으로 꼬집으면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크지 않으며, 사람은 누구나 연약해서 이상을 쫓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여준다.
아니, 오히려 현실적인 사람들일수록 더더욱 헛된 이상을 쫓으며 살아가는 것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술꾼은 산타 동상이 깨어지자, 자신의 이상에서 깨어나 그냥 그 자리를 떠나지만, 사람들은 돈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를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이상을 구경하면서 다소 조롱하고 조소를 입에 담던 사람들은 술꾼의 이상이 깨어지면서 오히려 이상속으로 젖어들어간다.
동상이 깨지자마자, 이상에 취한 사람은 이상에서 깨어 그것이 그저 동상임을 자각하고 사라지지만,
되려 이상을 쫓는 남자를 구경거리고 삼던 현실적의 사람들은 막상 그곳에서 돈이 나오자, 동상에서 나온 돈을 자신들의 이상을 채우기 위해 마구 짓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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