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의 고양이

소설 2024.10.26 댓글 큐널 블로그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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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띠띠띠

스크린 도어의 LED가 깜빡거리고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내린다.
사람들은 내리자마자 빠르게 발을 움직인다. 역의 양쪽 출구 계단을 향해, 중앙쯤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저마다 어디론가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늦은 새벽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언제나 붐비는 한 지하철역이다.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황색 옷을 입은 까만 눈동자가 있다.
바로 이 지하철역에 살고 있는 고양이다.
이름은 나비.
나비는 이 역의 구석진 곳에 있는 어두운 창고 안에서 태어났다.
지독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 어미 고양이가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도무지 따듯한 장소를 찾지 못해, 어쩌다 지하철역의 문 열린 창고까지 내려와서 나비를 낳은 것이다.
어미는 나비를 낳고 몸을 얼마 동안 추스르고 난 후에는 2번 출입구 방향으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하철역 직원이 창고에서 나비를 발견했을 때, 나비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앵앵거리고 있었다. 배고픔에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품은 따듯했고
나비는 직원의 보살핌을 받으며 기운을 금세 되찾았다.
나비라는 이름도 이 직원이 지어준 것이다.
나비는 지하철역에서 그 직원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것도 벌써 4년 전.
이제 어엿하게 자란 나비는 사람들이 붐빌 시간이 되면 창고에서 나와 역의 오래된 빨강 초록색의 의자 아래에 배를 깔고 누워서는 인간들이 오고 가는 것을 구경한다.
사람들은 바빠서 고양이가 거기에 있다는 걸 모른다.
예전에는 그래도 몇몇 어린애들이 의자 곁을 돌아다니다가 나비를 발견하기도 했다.
애들은 키가 작고 세상의 온갖 것들에 관심을 가지곤 하다 보니, 나비와 눈이 곧잘 마주치곤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랬던 애들도 대체로 줄 없는 이어폰을 끼고 있거나 현란하게 싸우는 영상들을 보고 있어, 나비 쪽을 쳐다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비를 처음 구해줬던 지하철역 직원은 몇 년 전에 죽었다.
그때는 스크린 도어가 역에 설치되기 전이었는데, 어느 중학생 하나가 지하철로 뛰어들었다가 직원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다.
나비는 그때 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울어댔고 오후 내내 지하철이 들어올 때면 하악질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비가 인간의 눈에 띈 마지막 사건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고양이가 거기 있다는 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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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늦었는데 왜 이건 또 안 닫히고 난리야."

잔뜩 성이 난 사람 한 명이 지하철과 역의 틈 사이에다가 침을 퉤하고 뱉었다.
요즘 들어, 스크린 도어가 자주 오작동하곤 했다. 지하철이 들어오고 모든 객실이 사람으로 가득 찬 채로 출발 준비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문이 잘 닫히지 않았던 것이다. 문이 자꾸만 열렸다 닫혔다, 열렸다 닫혔다 했다. 역에 오래 있으면서 많은 것들에 태연해진 나비에게도 종종 털이 곤두서게 거슬릴 정도였다.

나비는 똑똑한 고양이였다.
나비는 역 바깥의 동네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양이들이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진다는걸. 개중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비는 역을 잘 떠나지 않았다. 야생에서 이리저리 떠도는 것도 적성에 안 맞았고.
나비는 역에서의 생활에 만족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밖에 나가지 않아도 희한하게 누군가가 역 어딘가에 음식을 흘리고 가곤 했다. 그건 꼭 마법 같았다. 하루는 핑크색 크림이 올라간 도넛, 어떤 날은 닭다리, 또 어떤 날은 뜯어진 젤리 같은 것이 어딘가에 흘려져 있곤 했다. 그렇게 어딘가에 떨어져 있는 먹거리를 찾는 것도 나비에겐 쏠쏠한 재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른한 새벽이었다. 역은 한 사람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늘 그렇듯 나비는 의자 밑에서 사람을 구경하다가 어느새 꼿꼿이 앉아서는 가만히 눈을 붙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혀 꼬인 소리가 들려왔다.

"차.. 착하지 이리 온.."

나비는 처음에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자기를 발견한 인간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것도 그냥 누군가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인간을 부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술에 취한 채로 의자에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인간은 많이 봤다. 조금 있으면 지나가겠지. 그런데, 그 혀 꼬인 말투로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소리는 한참을 기다려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간절해지기까지 했다.

"이... 이리 온.. 야옹아.."

그 말에 나비는 인간이 자기를 부르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나비는 도도한 고양이였다. 술 취한 인간의 그깟 가벼운 유혹에 흔들릴 고양님이 아니었다. 나비는 자신이 석상인 마냥 자세를 더 꼿꼿이 유지했다.

"아.. 안 오네. 왜 안 오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패딩 주머니를 뒤지는 소리.

"아! 여깄다!
자!"

나비는 한쪽 눈을 슬며시 떴다. 나비의 눈앞에 500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더 큰 막대 달고나 사탕이 있었다. 금색 끈으로 묶이고 비닐포장된 사탕은 별 모양이 찍혀 있었다. 인간은 엎드린 채로 나비를 부르며 사탕을 연신 흔들어 댔다. 인간이 사탕을 흔들 때마다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가 반짝거렸다.

"이거 너 먹어!
내가 이거 뽑기, 어릴 때 엄청 잘했었는데, 오늘 지나가다가보니까 있는 거 있찌?
진짜 완전 추억!
그래서 아까 하트 모양 달고나를 모양대로 잘 쪼개서 이걸 상품으로 받은 거야.
흐하핳"

나비는 힐끗 뜬 한쪽 눈으로 이번에는 달고나 사탕 뒤의 인간을 보았다.
굵은 연회색 실로 짠 털모자에, 녹색 패딩, 안에는 진회색 후드티, 붉은색 목도리.
그리고 그 목도리 색보다 더 발그레한 얼굴로 족히 30살은 되어 보이는 인간이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로 의자 아래의 나비를 향해 정말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양님은 도도했다.
다시 눈을 감고는, 이번엔 고개를 획 돌렸다.

"아.. 먹기 싫구나.
그래도 너 역시 진짜 고양인 맞는 거였어.
아까부터 너무 가만히 있길래 인형인가 긴가민가했거든.
헤헤..
그러면 여기 네 앞에다 둘 테니까 먹고 싶으면 언제든 먹어.
자!"

그 인간은 달고나 사탕의 비닐봉지를 야무지지 못한 손으로 어렵사리 풀어서 나비의 최대한 가까운 곳에 살포시 놔뒀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형형색색의 오래된 지하철 의자에 앉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말이야. 어릴 때부터 진짜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있었다?
내가 부모님도 어릴 때 돌아가셔가지고, 그 친구한테 정말 의지를 많이 했거든.
남은 게 빚밖에 없었는데, 할머니도 중학생 때 돌아가시고..
우리 정말 열심히 일했거든.
그래서 빚도 이제 거의 다 갚고..
그 친구랑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저번 달에 그 친구가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한 거 있지.
근데 난 솔직히 덤덤했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일평생 나는 정붙일 곳 없이 살았고, 그 사람들은 고마운 사람이고 난 그런대로 잘 해나갔거든.
그래서 다 괜찮았단 말이야.
근데 내가 정말 싫었던 건 말이야.
내가... 그 친구가 죽기 전에 엄청 화를 냈단 거야.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에 비하면, 날 위해준 것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걸로..
언젠가는 모든 사람과 이별한다는 건 알고 있어도.
이 친구만큼은 이렇게..
이렇게 보내긴 싫었는데..."

그러면서 그 인간은 울기 시작했다.
나비는 그때 살며시 몸을 일으켜서는 인간의 품속으로 다가갔다.
술 냄새.
생각보다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인간은 나비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그러기를 몇 십분째.
인간은 이제 좀 진정이 된 것 같았다.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내 주변엔 아무도 없거든 이제.
나한테 와줘서 고마워.
아유 귀여워라."

인간은 나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인간의 따듯한 온기가 다시금 나비에게로 전해졌다.
나비는 기분 좋게 가르랑거렸다.
나비는 사실 사람의 온기가 조금은 그리웠었던 것 같다.
둘은 한동안 그러고 앉아 있었다.

띠띠띠띠

스크린 도어가 열렸다.

"아, 지하철 왔나 봐.
난 이제 가볼게!"

인간은 나비를 의자에 부드럽게 내려놓고는 나비에게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흔들면서 열린 스크린 도어를 향해 뛰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지하철이 없었다.
스크린도어가 지하철이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오작동해서 미리 열렸던 것이다.

"으악!
아.. 어 아야야.."

스크린도어 너머 어두운 터널 밑에서 인간의 끊어질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야옹아아.. 사람 좀 불러와줄래?
나 못 움직이겠어.."

나비는 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울어댔다.
나비는 거세게 울부짖으며 사람이 있을 법한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스크린도어의 시작부터 끝까지.
먹을 것을 찾곤 했던 역의 모든 구석구석을.
계단을 올라가고, 출입구의 모든 곳을 지나다니며.
나비는 미친 듯이 울어댔다.
나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비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비를, 그 인간을 보고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하철이 곧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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