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이야기

소설 2024.10.26 댓글 큐널 블로그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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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벗어나야만 했어. 그 가난을 말이야. 난 그래서 매사에 당당하게 행동했지. 가진 게 없이, 그저 입양되어 왔어도, 난 그들보다 언제나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힘썼고 그렇게 지금 그 자리까지 갔었던거야.

그는 내가 곁에 있을 때면 언제든 그렇게 말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곳까지 들어오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저 말을 할 때 빼고는 늘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가 매우 크고 마른 체형에 항상 두꺼운 안경을 쓴 죄수는 입술을 아래로 내린채로 늘 침울하면서도 어떤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내가 이 교도소에 있을 때만 해도 그가 유명 정치인으로 각종 tv방송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어째서? 어떻게 이토록 빠르게 그는 추락했을까?

며칠 뒤, 그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지난 세기 이후로 사람들은 점점 서로에게 무관심해져갔고, 이제는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도 서로가 없는 것마냥 그렇게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그가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밤이 되면 늘 코를 시끄럽게 골면서도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던 그가, 오늘은 코를 고는 대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내 위쪽에 있는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는 것이다. 바깥의 쇠창살에는 아직 푸른 하늘에 뜬 히끄므레한 초승달이 나무판자 바닥을 비췄다.
나는 내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침대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가 보였다.
두 손으로 이불 양쪽을 잡아 귀를 막고 끙끙 앓으면서 여기저기 뒤척이고 있는 것이 뭔가 괴로워 보였다. 내가 헛기침을 뱉자,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를 보며 일어났다.

웬일인가.

잠을 못 이루시는 것 같아서 잠시 와봤습니다. 괜찮으신가요?

그럼..

그러나 말꼬리를 가늘게 흐리는 그의 말은 확신이 없었다.

우웩

그는 2층 침내 아래 나무 바닥으로 뭔가를 통해냈다. 밝은 하얀빛 초승달에 비쳐서 그 뱉어낸 무언가의 색깔이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펄떡이는 빨간색.

옆쪽 2층 침대의 다른 죄수들은 이런 소리에도 곤히 잘 자고 있었다.
그가 한참을 헐떡거리더니 다시 입을 땠다.

그래.. 다 말해야겠군.
자네가 내가 마지막으로 볼 사람일지도 모르니.

낮이 밝으면 아프다고 간수에게 전해드릴게요. 치료를 해줄 겁니다.

아니.. 난 알아.
난 내 몸 상태를 아주 잘 안다고..
아마 난 오늘을 넘기지 못할걸세.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야.
후..
젠장..
이런 곳에서 내가 죽게 되다니.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는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그럼에도 저쪽 침대의 죄수들은 짐짓 코만 크흥 하고 몇 번 세게 골 뿐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꽤나 눈치가 보였지만..

그래.. 자네 이름이 뭔가?

빌 캐번디시입니다.

젊은 친구가 여긴 어쩐 일로?

아 어쩌다보니 사람을 좀..

그는 팔을 올려서 그만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냥 예의상 물어본 듯하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부잣집 아버지와 가난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네. 근데 그 빌어먹을 작자들이 날 양파 상자에다가 버리고 튀었어. 그러니까 나중에야 알게된 거지만, 난 사생아였던거지. 부잣집 도련님이 아들을 처신하는 것치곤 세련되지 못한 방법 아닌가? 근데 그럴만도 했어. 어머니가 아버지를 등지고 처음엔 날 키우겠다고 데려가셨다고 그러더라고. 근데 경제관념도 없고 어떻게 처신할 요령도 없이 무작정 그냥 모성애로 나를 거기서 데리고 나온 그 여자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었던거지. 아, 내가 내 탄생의 모든 진상을 알게된 이후에 내가 성공한 후에 그 부잣집을 다시 찾아가서 알게된 사실이야. 내 친아버지라고 할 사람은 이미 죽었고, 그의 친딸이 나와서 나에게 알려주더군. 따지자면 이복 동생인데, 내 어머니라고 할 사람이 나를 양파 상자에 버리고는 나이가 들어서 그 아버지의 부잣집에 전화를 해서는 아버지가 이미 죽엇다고 하니까 괜히 감정이 북받혀가지고는 나를 버린 것의 진상을 내 이복 누이한테 다 불었다지 뭐야. 그래서 알게된거지. 어디까지 했더라. 그래. 아무튼 난 버려졌네. 그 상태로 있다가 근데 어느 한 마음씨 좋은 부부한테 입양되었어. 끔찍한 사람들이었지. 그 둘은 정말로 가난했어. 나를 들고 튄 내 친모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지. 가난하고 멍청한데 정은 많은, 그래서 난 그들이 싫었어.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대체 왜 생판 모르는 주워온 남의 인생까지 돌보려고 하는거냐고! 대체 왜!

그는 갑자기 이 시점에서 철로된 2층 침대의 헐거운 난간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 소리에 드디어 저쪽 침대의 1층 죄수가 깨어났다.
몸집이 비대하고 눈 한쪽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는 무시무시한 사내였다.

조용히 좀 합시다. 형씨.

그는 달빛에 그림자진 침대 밑에서 잠시 일어나서는 우리가 있는 2층을 보고는 감정 없이 위협적인 말투로 조용히 말하고는 다시 잠을 청하려고 돌려 누웠다.

그러나 그는 목소리만 좀 낮췄을 뿐. 이야기를 관둘 생각이 없었다.
뭐, 당신도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저쪽에 호랑이가 있다 하더라도 당장에 공격할 태세만 아니라면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어질 것이다. 아닌가? 나만 그런가?

아무튼 그는 더 본격적으로 얘기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침대 아래로 내려가자는 시늉을 했고, 유리는 달빛이 비치는 창살에 앉았다. 나는 잠자는 호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춰달라고 부탁했다.

그집은 끔찍했어. 암 끔찍했고 말고. 정말 지독했어. 지독했지. 암. 바퀴벌레가 바닥을 돌아다니고 곰팡이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뒤덮는 반지하! 난 거기 살았어. 내가! 이 위대한 그로미셸 루이스가 말이다!

풋..

1층 침대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여왔다. 이름으로 웃은 것이다. 여자 이름 같아서일 듯. 아, 그리고 교도소에 있는 같은 죄수임에도 흡사 돈키로테마냥 자기를 높이는 것도 웃겼을 것이다.

그래.. 우습지. 내 이름. 이게 그 양부모란 작자들이 한 또다른 끔찍한 짓이다. 아이가 인생에서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데, 남자 아이한테 이런 여자 이름을 붙여주다니. 성부터가 그다지 남성성이 없다면 이름이라도 좀 좋은 걸로 붙여줄 것이지. 안그래도 자신감 없던 애한테 더더욱 자신감을 떨어뜨려놨어! 그리고 그들은 내 졸업식에도 한번도 와주지 않았지. 늘 쓸쓸하게 반지하에 가면 선물 하나만 있었어. 그냥 선물 하나만! 그들은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난 맨날 혼자였지. 그래 혼자였어. 내 말도 거의 듣지 않았어. 집에 오면 내 말에 늘 건성으로 대답해!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어. 나는 무척 잘 먹는 아이였는데, 그들은 밥을 거의 주지 않았어. 물만 줬지. 성장기의 아니는 물만 먹고 바짝 말라서는 키만 커졌어. 살은 안 붙었지. 10대를 내내 보내는 학교에서도 나는 별명이 막대기였지. 그 별명이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 한번은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에게 고백했을 때도 자기는 젓가락이랑 안 사귄다고 했던 게 얼마나 치욕적이었는지 알아? 전교생이 다 보는 운동장이었는데. 먹고 싶어도 돈도 없고. 수돗물로 배 채우는 가난을 네들이 어떻게 알아? 이런 젠장..

그는 잠시 쉬다가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이런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도 보다시피, 나 째째하고 이 나이 먹조록 지금 나이 거의 40가까이 먹도록 아직도 학창 시절 때 창피했던 거 어릴 때 싫었던 거 다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이야. 마음껏 비웃으라고. 아직도 어린애인 거. 정신은 어린애 맞거든. 근데 정신력만은 내가 강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 왜냐하면 나는 저런 상황에서도 절대로 굴하지 않았거든. 절대로 내가 가난한 것을, 상처 받은 것을 보이지 않았어. 아무에게도. 양부모에게도. 지나갈 때마다 애들은 냄새 난다고 속삭이고 어른들은 말랐다고 욕하고 그 모든 가난으로 생긴 역경 속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도 잘 자라는 양파처럼 굳세게 자라왔다 이 말이야!

근데.. 근데... 이런 빌어먹을. 젠장.. 고 형사 그놈이.. 그놈이.....!!!!

그는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교도소 문의 쇠창살을 잡고는 바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교소도 안에도 그 울림이 다 퍼졌고 아주 멀리까지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 쳐 울렸다.
덕분에 교도소 안의 우리 침대를 제외한 2쌍의 2층 침대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일어났고 일제히 그에게로 달려가서는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간수가 달려와서 막은 것은 새벽 3시, 발길질이 시작되고 내가 말리려고 애를 쓴지 10분이 지난 후였다. 바닥에는 옥수수 2알이 나뒹굴었다.

여기저기서 피가 흐르고 만신창이가 되어 시퍼런 멍이 든 그는 그래도 정신적으로는 좀 진정되었는지 헤헤 거리며 검붉게 부푼 얼굴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다음은.. 자네도 알지..

입술 부근이 이가 빠지면서 너무 부어서 그가 어눌하게 말했다.
나는 간수가 가져다준 얼음팩 하나를 그의 얼굴에 올리면서 얘기를 계속 하라고 손짓했다.
이가 빠져서 발음이 새는 것을 그대로 적었으니, 읽기 불편해도 양해 바란다.

그흐에 우이 좋게 정계에 입문했지. 은데 으 내아 무은 탈세를 하고 도악에 성우앵도 햇다은 거아. 주었어. 양부모은.. 두 분 다... 자되이 저에 다 죽었어..... 거이서.. 내아 이제 겨우.......
내가 미아해.. 다.... 미아해..

그는 코를 훌쩍거렸다. 아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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