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의 편지

소설 2024.10.27 댓글 큐널 블로그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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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막 올라오던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방학을 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날은 이미 초여름에 접어들었다. 밖에는 여전히 해가 환하게 떠 있었다. 어느 때와 같이 중학교 1학년 지호는 하교 후, 거실 창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호의 아파트 창가 바로 앞에는 넓은 6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유리가 있어서 소음을 어느 정도 막아줬지만, 그래도 귀기울이려고 하면 금방 차가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지호의 일상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학교가 끝난 후에는 통금 시간에 따라, 오후 6시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거실에 앉아 있어야 했다.

부엌 가스렌지 위에는 뚝배기에 된장찌개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지호의 아버지는 식탁에 앉아 눈을 내리깐채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저녁 먹어야지." 엄마가 말했다. 지호는 창밖을 보면서 딴생각을 하느라, 엄마 말을 못 들었다. "대답 안 해? 딴생각하지 말고, 앉아. 어른이 말하면 빨리 와야할 거 아니야."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면서 투덜거렸다. 뭔 애가 저렇게 매번 꾸물대고, 공상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호는 '네'하고 대답하고는 바로 식탁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지호네 집안 분위기는 엄격했다. 지호는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밥을 먹었고, 아버지는 간혹 지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크게 낸다던지, 수저를 동시에 든다던지, 먹는 소리가 나거나 할 때면 불편한 숨을 들이쉬거나 내쉬면서 지호를 노려봤다. 지호는 그럴 때마다 무엇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슬렀나 조심하려고 애쓰면서 밥을 먹었다. "참, 지호야. 오늘 너한테 편지가 왔단다." 엄마가 말했다. "편지? 얘한테 올 편지가 뭐가 있다고. 지금 여기서 뜯어서 읽어봐라." 편지봉투가 지호에게 전달되었다. 편지 봉투는 흰색. 가장가지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선들이 사선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받는 사람 란에는 지호네 집 주소와 우편번호, 그리고 지호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보내는 사람 란에 주소와 우편번호는 있었지만,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누군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지호는 편지를 뜯고 읽기 시작했다.

안녕 지호야. 내가 누군지 지금은 밝힐 수 없지만, 나 널 좋아해!!
난 널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왔고, 너에게 이렇게 고백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어.
너도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고 괜찮다면 내 편지에 답장해 주지 않을래?
이 편지는 혼자서 뜯어봐!

편지는 연애 편지였다. 지호의 귀가 투명한 분홍빛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편지 내용을 듣고 엄마는 놀라움과 동시에 즐거워하는 표정이었고,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졌다. "다 읽었음 일어나봐라." "네." 지호는 감정을 억누르고 무덤덤한 척 애썼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허둥데다가 그만 수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저를 주운 후 지호는 편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잠깐. 편지는 여기 두고 가라." 엄마는 아버지를 약간 원망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지호는 그 말에 따랐다.

지호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편지를 갖진 못했지만, 어찌됐든 누군가 지호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니까. 지호는 약간 체한 것 같았고, 이게 기분이 좋은건지, 아니면 불안한 느낌인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 지호의 방 안은 온통 무지개와 별빛으로 가득찼다. 지호는 침대를 이리저리 구르며 잠을 설쳤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느낌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지만, 지호는 이제부터 모든 게 달라질 것임을, 이전과는 다시 같지 않을 것임을, 자신의 인생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새벽에 선잠을 자다가 꺴을 때, 지호의 방은 조용했다. 모든 게 꿈이었을까? 하지만 여전히 심장이 약간 조용히 쿵쿵 뛰고 있었다. 그리고 텅 빈 부엌으로 가자 거기엔 아직 편지가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지호는 방에서 손전등을 들고 와서 부엌에서 혼자 편지에 있는 주소와 그 내용을 읽고, 또 읽어서 완전히 외워버렸다.

여전히 잠을 조금 자서 비몽사몽한채로, 지호는 밤을 새서 편지에 보내는 답장을 썼다. 편지지와 우표는 아빠 서재 책장 서랍에서 하나 몰래 빼왔다. 그게 어쩌면 나쁜 짓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호는 편지에 답장을 빨리 보내고 싶어서 그런 일을 했다. 한자한자 정성을 들여서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한 장문의 편지였다. 그런 글은 지호가 이전까지 한번도 써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지호는 편지를 봉한 후에 딱풀을 이용해서 가장자리와 우표를 붙였다. 주소와 우편번호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온가족이 모여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지호는 평소보다 일찍 나가려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말했다. "평소보다 일찍 어디가냐?" 지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제 편지 답장 붙이러 우체국 가보려고요."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알 수 없지만, 지호는 아버지가 엄청나게 불편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느꼈다. 아버지는 언제나 지호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기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기를 명령했다. "너는 그 편지 못 붙인다. 이리 내놔." 지호의 고개가 숙여졌고, 입은 시무룩해졌다. 지호는 밤새 쓴 편지를 아버지에게 줬고,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 있다가 늘 가던 시간에 학교에 갔다.

지호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친구들과 pc방도 가보고, 분식집도 가고, 애들 집에 놀러도 가고, 여행도 종종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지호의 부모님은 그런 걸 전혀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걸 자유롭게 하는 아이들을 불량한 애들이라고 보셨다. 지호는 항상 수업이 끝난 거의 직후인 오후 6시에는 집에 와야했고, 그걸 또 성실하게 따랐다. 지호는 특히 아버지가 무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가족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존중했고 또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아주 가끔 회사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오는 날은, 풀어져서는 지호에게 살갑게 대해줬다. 지호는 아버지의 술냄새가 싫으면서도 그렇게 그때만큼은 그렇게 서글서글하게 대해주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런 날은 매우 드물었고, 평상시 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웠다.

지호에게 연애 편지가 오고 일주일이 지났다. 심장의 두근거림은 차츰 잦아들다가, 나중에는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사라져갔고, 오직 답장을 보내지 못해서 마음이 좋지 않은 느낌만 남아있었다. 비오는 날이었다. 지호는 아버지의 심부름에 따라 비옷을 입고 바깥에 있는 우편함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두 눈을 의심했다. 지호에게 다시 편지가 와 있었다. 이번에도 같은 편지지였다. 흰색. 가장가지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선들이 사선으로 장식되어 있음. 지호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지호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그 자리에서 편지를 바로 열어보았다.

지호야 미안해. 누군지도 밝히지 않았으면서 답장을 달라고 하니까 많이 당황했겠지.
어쩌면 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편지를 받아보긴 한걸까? 이 편지도 간 거긴 한걸까? 답장이 없으니까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내가 널 아주 오랫동안 알아왔고, 또 좋아하고 있는 건 진심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지금 당장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지만, 그래도 내 편지를 읽었다면 사실 뭐라도 좋으니까 제발 답장을 줬으면 좋겠어.
그래도 만약 널 번거롭게 만들었다면, 아님 내가 부담스러운거라면 그냥 잊어줘. 미안해.

지호는 옷 속에 편지를 숨겼다. 그리고 다른 우편물들을 들고 들어왔다. 아버지는 지호에게 왜이렇게 늦었냐고 물었고 지호는 얼버무렸다. 지호는 방에 들어가서 빗물에 젖은 편지지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곧바로 답장을 썼다. 오해라고, 자기도 사정이 있어서 답장하지 못했지만, 그건 편지를 못 받은 것도 아니고, 당황한 것도 아니며, 부담스럽거나 번거롭지도 않았다고, 나는 네가 날 좋아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고. 그렇게 썼다.

다음날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저녁에 지호는 편지를 손에 쥐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지호는 나가다가 엘리베이터로 올라오는 아버지와 마주쳤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빼앗김과 동시에 한 주동안 평일에 부모님과 같이 나갈 수도 없고, 주말에도 밖을 나갈 수 없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일주일 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저녁 식사 자리였다. 아버지는 평소보다 늦었는데, 그러면서 지호 이름으로 된 편지를 들고 온 것이다. 헌데, 아버지가 뭔가 평소보다 더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아버지는 말했다. "저번에도 이런 편지가 왔었지?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진 모르겠지만, 이건 아무도 못 봐!" 그리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라이터를 이용해서 편지를 불태워버렸다.

지호가 편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고, 편지는 재가 되어서 사라졌다. 지호는 처음으로 식사 자리를 벗어나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문을 잠근 다음 침대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울었다.

다음날 편지에는 뭐라고 쓴걸까.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걸까. 지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학교 수업을 마쳤다. 그리고 지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호는 열차역으로 가서는 여러번 읽어서 외워버린 주소지를 행선지로써 역무원에게 불렀다. 편지를 읽을 수도, 답장을 보낼 수조차 없다면, 직접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고, 오랫동안 지켜봐왔다고 한 사람이 누군지를 지호는 알아야만 했다.

그곳은 지호가 사는 곳에서 열차를 타고 1시간 넘게 가야하는 거리였다. 분명히 다녀오면 한 달은 외출 금지를 당할 터였다. 하지만 지호는 그 사람이 누군지,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차를 타고 가면 갈수록, 집들이 점점 사라지고, 논밭과 산이 드러났다. 그곳은 꽤나 시골이라 집도 몇 채 없고 사람도 별로 안 다니는 한적한 동네였다. 지호는 주변에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주소지의 위치가 어딘지를 물으면서 결국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은 빈집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저 집은 불과 얼마 전에 이사를 갔다는 것이었다. 지호는 할 수 없이 열차역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그런데, 그때 편지 봉투를 든 아이가 지호 옆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너무 순간이어서 평소 같으면 미처 신경도 쓰지 못했겠지만, 지호는 순간 그 아이를 뭔가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는 그 아이에게 달려가서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지호를 보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눈물이 약간 고인채로 빙그레 웃었다. 둘은 말없이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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