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심부름

소설 2024.10.26 댓글 큐널 블로그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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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이 펼쳐진 작고 작은 시골 마을의 작은 길, 프레드릭 윙클은 이곳을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하며 곧잘 지나다녔다.
길은 겨우 작은 아이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만큼 작은 흙길이었고 그 주변 일대는 온통 논밭이었다. 윙클은 지난해 여름부터 유난히 아버지에게 술 심부름을 자주 받아서 이 길을 쭉 지나가곤 했다.
양쪽 어깨에는 지난 봄에 아닌데 아닌 사납고 새찬 비로 마을 수호수의 부러진 커다란 나뭇가지가 들쳐매져 있었고 그 양쪽으로는 술을 가득 채운 양철 동이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윙클의 아버지는 이제 아들이 6살이 먹자, 이런 심부름을 시키기에는 다 컸다고 생각했는지, 해가 뉘엿뉘엿 져갈때면 집으로부터 성인 걸음으로 2시간거리가 떨어져 있는 읍내에서부터 술을 가져오도록 시켰다.
윙클은 그렇게 술을 매번 가져왔고 아버지는 그 술을 맛있게 받아 마셨다.
이건 이걸 읽고 있는 당신과 나의 비밀인데, 윙클은 양동이에 담긴 술을 이따금씩 한 두잔 몰래 마시곤 했다.
양쪽 어깨가 너무 무거워서기도 했고
양동이 안에 든 희멀건 액체가 과연 무엇이기에 아버지는 거의 매일 이렇게 나에게 먼 곳까지 심부름을 시키는 걸까 하는 궁금증해서이기도 했다.
한 두번은 너무 많이 마셔버리는 바람에 집과 읍내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그냥 고주망태가 되어 뻗어버리기도 하였으나, 양동이는 매우 커다랬고, 그의 아버지는 그 전날 마신 술기운인지 무기력증인지 아무튼 간에 윙클이 술을 가지고 오기 전까지는 항상 골아떨어져 있기 일수였기에 그를 찾지 않았다.
윙클은 간혹 술을 실수로 너무 많이 마셔버리거나 발에 힘이 풀리거나 돌뿌리에 걸려 넘어져서는 술을 쏟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다시 읍내로 돌아가서 술을 받아오곤 했다.
뭐 돈이 부족하진 않았느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윙클은 꽤나 경제 관념이 있었어서(그래봐야 매일 술에 쩔어서 사는 아버지 보다 좀 있었던 정도다. 6살짜리 애한테 뭘 얼마나 기대하겠나), 새벽에는 공병을 줍는 등의 일을 해서 자기 몫의 마실 분량과 아버지가 마실 수 있는 분량 정도를 구분했다.
그게 아닐 때면 사실 그냥 읍내 어른들이 윙클을 예뻐하면서 술을 다시 채워주곤 했다.

그러다가 여름이 좀 가셨을 때였나.
해가 점차 그 머리를 저 지평선 너머로 감추고 있을 때였다.
윙클은 늘 지나가는 열쇠구멍 같이 생긴 밭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붉은 색 웃도리에 쑥색 반바지를 입고는 한 가운데 서 있는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하늘로 팔을 높이 편채로 논밭 한가운데에 발을 담그고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다.
윙클은 어른들이 묵묵히 일을 하며 움직이는 것은 종종 보아왔으나, 이렇게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지난 가을에 밭의 주인이 도시로 떠나, 비어 있는 이 열쇠구멍 밭에 서있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윙클은 소리내어 그 사람을 불렀다.
'저기여어~ 거기서 그러고 계심 안되여어~ 감기들어여어~'
그래도 그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윙클은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한번 비볐다. 그때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었고 그 서 있는 사람의 너저분하게 긴 머리카락이 그 사람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 사람은 얼굴이 머리를 간지럽히자, 그 순간 왼손을 내려서는 얼굴을 긁적였다.
아, 잘못본 것이 아니었구나. 윙클은 용기를 내어 어깨에서 나뭇가지를 내려놓고는 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논밭에는 지난 이틀간 내린 빗물이 아직 윙클의 발목 너비까지 차 있었고 물은 저녁 바람을 맞아 매우 차가웠다.
'저기여어~'
논밭을 걸어가며 윙클은 저 말을 계속 외쳐댔다. 걸을 때마다 맨발이었던 윙클의 발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러운 진흙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윙클이 계속 불렀음에도 그 사람은 윙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제 십수 발작만 더 가면 그 사람에게 닿을 것 같았던 그 순간,
'으얽!'
윙클은 뭔가에 걸려서 앞으로 넘어졌다.
차가운 물이 얼굴과 온몸을 때렸다.
윙클은 넘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왜인지 그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윙클이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데, 눈 앞에 그 사람이 다가와 있었다.

머리가 너저분하게 길고 쑥색 반바지를 입고 빨간색 반팔을 입은 그 사람은 가까이에서 보니 키만 윙클보다 좀 더 컸을 뿐, 얼굴은 윙클의 나이 또래 정도로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남자 아이였다.
아직 지지 않은 석양빛이 역광으로 아이뒤에서 비치는데 아이의 얼굴은 그런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었음에도 꽤나 잘 생겼었다.
'아.. 안녕'
윙클이 인사하자, 그 아이는 다정하게 윙클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이의 행동과 표정 말투는 따듯했지만, 손은 그런 곳에 오래도 서 있었는지 아주 차가웠다.
'너.. 손이 차'
윙클이 내뱉은 처음 말은 그것 뿐이었다.
그렇다.
윙클은 의외로 소심했고 낯을 가렸다.
아이는 한번 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눈으로 이렇게 말하는듯 했다.
'여기서 나가자.'
윙클은 어쩐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고 아이를 따라 나갔다.
깡시골이었지만 그래도 저 멀리에는 가로등 하나가 있었고 둘은 그 아래에 앉았다.
윙클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밭에 서 있던 그 아이는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옥수수였다. 그것도 삶은 것.
김이 모락모락 났다.
윙클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사실 이렇게 따뜻한 것을 건네받는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윙클의 어머니는 윙클이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윙클이 어릴 때 어머니와 윙클을 단 둘이 두고 무슨 도시에서 사업을 했다든가 하다가 망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결코 윙클에게 무력을 행사하진 않았지만 술꾼이었고, 매사 날카로웠으며 무기력했다.
어린 윙클은 그나마 따뜻한 마음씨가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서 길러졌다.
그러나 그나마도 작년을 마지막으로 가까운 곳에 사는 이들은 전부 꿈을 찾아 읍내나 도시로 떠나버렸고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나이들어서 치매에 걸리신 할아버지 한 분을 빼고는 다 죽어버렸다.
그 이후로 윙클은 자신이 읍내에서 직접 뭔가를 사서 먹었다.
하지만 어린애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앞서 말했다시피 공병 주워서 판 게 그만이었고 그마저도 없을 때에는 사람들이 거지꼴에 가까운 이 아이를 챙겨준 것이었다.
이렇게 한동안은 윙클은 챙김을 받기도 하였으나, 사실 이번 연도부터는 워낙에 흉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 사람들이 예민해져 있어, 윙클도 눈칫밥을 먹으면서 구걸을 하거나 차마 그것도 안될 때면 굶어야 했다.
그래도 배고픔에 몸서리칠 때는 하늘이 항상 도우시는지 어디에서든 먹을 것이 나타나곤 해서 윙클은 그래도 뭔가를 먹긴 했다.
그게 아니면 이고 있는 술을 마셨고.

이번에도 그런 것에 가까웠다.
지난 사흘동안은 공병도 없었고, 사람들도 도와주지 않았고 구걸도 실패했으며 굶은채로 아버지의 술만 날랐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앞에 따뜻한 옥수수가 온 것이다.
윙클은 이걸 먹어도 되는걸까 생각하며 밭에 서 있었던 아이와 옥수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버지에게 그래도 일말의 정을 가지고 있었던 윙클은 늘 아버지가 술에 취하든, 취하지 않았든 간에 윙클에게 했던 한 가지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지 마라. 선뜻 먼저 다가오는 이를 경계하라.'
하지만 어린 소년에게 한 끼 식사는 너무도 간절했도 윙클은 결국 옥수수를 먹어버렸다.
소년은 어디서 꺼냈는지 자주색 모포를 꺼내서 추웠던 윙클에게 덮어주었고,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윙클은 그 따뜻함에 잠시 골아떨어졌다.
실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윙클은 눈을 떴다.
별로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진 않았다.
가로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그 이상한 사람은 온데간데 없었다.
윙클은 저 멀리에 내팽겨쳐 있는 술을 이고서는 다시 힘을 내서 집으로 걸어갔다.
따뜻함을 느껴서였을까 희한하게도 집이 이전보다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후로 며칠동안 술 심부름을 계속 할 때마다 윙클은 그때의 그 따뜻함이 그리워졌다. 계속해서 그 열과구멍 모양의 밭을 지나갈 때마다 쳐다보고 때로는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밍기적밍기적대고는 했다.
하지만 그 이상한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쯤이었을까.
아버지가 윙클이 술을 가지고 집으로 도착하디 전부터 일찍 깨어나 윙클에게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 것은.
윙클의 술심부름은 그때부터 더더욱 힘들어졌다.
읍내 사람들도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져서는, 이젠 윙클을 이상한 아이로 보기 시작했고
윙클은 배가 고프고 허기진 채로, 그리고 아버지가 무서운채로 술을 날랐다.
아버지는 이제 유독 술의 양에 더 민감했다.
윙클은 어쩌면 내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어겨서 이렇게 아버지가 날카로워진 걸지도 몰라, 하고 술 심부름을 더 열심히 했다.
이제는 열쇠구멍 밭 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쳐다보든 보지 않든, 이젠 그 아이가 거기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렸다.
힘든 하루하루였다.

어느 날이었다. 윙클은 머리에 열이 많이 났다. 그래도 이젠 아버지가 술심부름을 시키지 않아도이제는 자신이 먼저 술 심부름을 나갔다.
아버지는 자신이 시키지 않았는데 간혹 술을 들고 오는 윙클을 보면 너털웃음을 지으며 윙클을 토닥여주곤 했다.
윙클은 아버지가 좀 더 그렇게 자주 웃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이 오늘 아픈 자신보다 더 아픈 사람 같아 보였다.
윙클은 힘을 내서 읍내로 걸어갔고 술 가게로 갔다. 술 가게에서는 가게 주인과 손님 하나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술이 모르는 사이에 점점 줄었다는 것이었다. 윙클은 용기를 내어 술을 사러 왔다고 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었다.
윙클은 자기도 모르는 세에 술 도둑으로 몰렸고, 결국 고함 소리만 듣다가 술은 얻지도 못한 채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빈 양동이가 매서운 겨울 바람에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배가 고팠다.

집까지 중간쯤 다다랐을 때
그때 무심결에 석양이 지는 열쇠구멍 밭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날카로워지신 후로부터는, 아니 그 아이가 있다는 희망을 버린 후로는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은 그만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윙클은 뛰어갔다.
물은 무릎 위까지 차 있었지만 윙클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윙클은 소리치며 뛰었고 그러다가 또 넘어졌다.
온 얼굴과 몸을 차가운 물이 휘감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윙클은 거기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고, 이제 고개를 들면 아이가 손을 내밀고 있을 테니까.
어떻게 지냈을까? 어디서 온 걸까? 어떤 아이인걸까? 이번엔 좀 더 많은 걸 물어봐야지.
윙클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읍내에서 온 마을의 어른들이 논밭에 차디찬 몸으로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이틀이나 지난 푸른 하늘의 새벽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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